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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에 관하여/그냥일기

[그냥일기] 능지 검사로 전락해버린 수능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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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쉬운 2021년 수능 한국사 시험이 요즘 화제다.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페이스북에 20번 문제를 직접 포스팅하여 군불을 때고, 여러 인터넷 기사들이 보도하며 기름을 부었다.

 

나도 직접 풀어보니 15분 정도 걸리고 1문제를 틀려 48점이 나왔다. 국사 공부를 손에서 놓은 지 8년이 되었는데 절대평가제 때문에 1등급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등학교 한국사 교사들이 학생을 열심히 가르칠 이유가 있을까? 한국사 공부를 열심히 할 학생이 있을까? 8년만에 일반적인 센스로 푸는 사람도 1등급 나오는 마당에?

 

그럼에도 한국사는 수험생들 입장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과목이라고 하는데, 등급을 잘 맞아야 해서 중요한 과목인 게 아니라 한국사 과목 응시를 안 하면 해당 수험생의 전체 응시과목을 아예 무효화해버리는 패기로운 방침 때문이라고 한다. 응시했느냐 안했느냐의 기준도 과목 선택여부가 아닌 OMR카드가 있냐 없냐로 판별한다고 하니 고3 수험생들 입장에서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능지 검사 1 : 돌과 금속 구분하기

내가 직접 문제를 보니 역사문제라 할 수 없는 기초지능검사 수준의 문제가 10문제 간격으로 하나씩 총 3개가 나온다. 그 중 가장 압권인 것은 20번이 아니라 1번이다. 문해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틀릴 수가 없게끔 해놨다.

사냥에 써야 하니까 앙부일구와 상평통보는 배제되고, 석기니까 동검과 덩이쇠가 배제된다.

그런데 이 문제가 3점이다. 

 

능지 검사 2 : 사극 복장으로 추측하기

10번도 3점 치고 너무 쉽다. 우선 보기 4, 5번은 제껴두고 시작할 수 있다.

사극에 자주 나오는 조선시대 상인들의 복장을 기억하고 있다면, 통공 정책과 금난전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독립군이나 진골을 고르지 않고 1번을 체크하기 쉽도록 유도하는 메커니즘이다.

 

능지 검사 3 : '남' 과 '북' 활자 일치여부 체크하기

20번 역시 3점짜리치고는 너무도 쉬운데 1~4번의 선지가 각각 조선/고려/고려/조선이라는 사실을 아예 모른다 하더라도 지문을 잘 읽어보면 '남'과 '북'이 들어가는 5번을 찍을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20번 문항을 더러, 친북 성향의 문재인 정부가 본인의 공을 스스로 높이기 위해 본인 정부의 행적을 문제에 넣도록 평가원에 모종의 압력을 행사했다! 라고 주장하는 능지들이 실존한다는 점이다. 짐짓 북무새 문재인 정부의 짓이겠거니 하고 팩트체크도 안하고 글을 싸는 것이다.

정부가 평가원에 그런 정치성 짙은 외압을 행사할 유인이 있는지는 차치하고, 남북 기본 합의서는 현 정부의 업적도 아니다. 좌나 우나 팩트에는 관심이 없고 니편내편 팬덤정치, 흑백논리 프레임에만 갖혀 있으니 이런 헛소리들이 SNS를 떠도는 것이다.

억까 능지가 탄로나자 "아 내 의도는 현대에 일어난 일을 충분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무작정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듯한 프레임이 문제라고 지적한 거였음 ㅇㅇ"이라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남북 기본 합의서(1991)와 6.15 남북 공동선언(2000)은 보수정권 하의 2010년대에도 빈출되던 개념이었다.

 

전반적으로 금번 수능 한국사를 평하자면,

공무원/공기업을 준비하는 데 필수적인 한능검의 뒤를 잇는 새로운 의미의 한능검 (한국인 능지 검사)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절대평가제 기반으로 운용하고 문제를 쉽게 낼 것이면, 그냥 한국사를 고교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여 가르치는 것으로 족할 일이다. 굳이 문제 출제와 수험생의 응시에 비용과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 각 대학교가 한국사 등급을 별로 신경쓰지 않을 것이기에 대입 과정상의 아무런 실익도 없으니 수능에서 아예 한국사를 빼 버리느니만도 못하다. 

 

내 생각은 정부의 이러한 절대평가제+쉬운 난이도 방침에 반기를 들 목적으로, 작정하고 출제위원들이 멕이기 위해서 기초지능검사 수준의 문제를 낸 것 같다. 언론에서 두들겨 맞는 반작용을 유도해 다시 실체와 효용이 있는 시험으로 돌아가고픈 큰 그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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