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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에 관하여/수불석권 프로젝트

[수불석권 프로젝트] (5) 불패의 신화 전대협 이야기 6년사 (전대협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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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발간된 도서 '불패의 신화 전대협 이야기 6년사'는, 웬만한 도서관에는 비치되어 있지 않은 집단회고록 성격의 책이다.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오영식, 송갑석 등의 거물급 정치인을 대거 배출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기부터 6기까지의 각 기수가 모여 당시의 일화와 의미를 엮어내었다.

87년 ~ 92년 활동 후 93년부터는 한총련 체제로 넘어갔으니 전대협이 막을 내린 지 2년만에 스스로의 활동들을 평가한 것이다.

중고로 구매하니 노동운동하시는 듯한 분이(단결투쟁 조끼 착용) 본인이 직접 배송해주셨다. 

 

가장 크게 느껴진 것은 진짜 당시 학생들은 공부할 시간 없었겠다는 것.'이 많은 행사를 다 챙긴다면 80~90년대 학생운동가들은 공부는 언제 하지?'라는 생각이 읽으면서 계속 들었다. 

탈북자에 대한 막말로 침몰해버린 '통일의 꽃' 임수경 씨의 89년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에 대한 회고도 상세하게 볼 수 있다.


이 책은 586세대의 자뻑과 당시 대학생활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상깊게 읽은 구절들을 하나씩 인용한다.

"고려대는 당시만 해도 조치원 서창캠퍼스까지 포괄해서 유세를 했는데 서창캠퍼스 학생들은 학생회장이 선거때만 얼굴을 비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유세를 시작하기 전 '학생회장들이 선거때나 표받으러 오지 그 후 뭘 했느냐. 이게 국회의원 선거와 다를 게 뭐냐?'는 항의를 받은 이인영 후보는 준비해간 유세문을 찢어버린 후 손가락을 깨물어 '서창의 고통과 함께 하겠다'는 혈서를 쓰기도 했다. - p.14~15,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전대협 1기 - 1987)

분캠에 대한 차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지금의 20대 앞에서는 혈서 써봤자 '??그래서 뭐? 공약으로 승부봐야지 또 쇼하네;;' 라며 시니컬한 반응이 나오겠지만 87년 당시에는 호소력이 있는 액션이었나보다.

"6.10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전대협 지도부들은 8.15를 준비하면서 통크게 사업하자는 생각을 가졌다. 오영식 씨는 서총련 중앙정책위원 정은철 씨(연대 85)에게 예산에 구애받지 말고 사업을 잡아보라고 했다. 당시 정은철 씨가 올린 예산안은 8.15투쟁에 쓰일 중앙 예산만도 1억 5천만원에 이르렀다. 고민 끝에 상임위는 1억5천만원 예산안을 통과시켰다...(후략) - p.109, 오월에서 통일로 (전대협 2기 - 1988)

88년 1억 5천만원이면 은마아파트 세 채를 살 수 있었다. 
정말로 통 크게 잡은 투쟁예산안보다는 예산안을 통과시킨 상임위 의결이 더 유머다.

진짜로 현실성 있는 예산이라 생각했을까? 

"문익환 목사의 북한 방문을 기회로 잡은 정권은 울산의 현대 투쟁을 강압으로 진압했고 이에 맞선 노동자와 학생을 탄압했다. 급기야 단순한 학내문제로 시작한 동의대 학생들의 시위를 초강경으로 진압하면서 전경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학생들을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도록 했다. (5.3 동의대 사태)" - p.130,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전대협 3기 - 1989)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당시 전경들의 직접적 사인(死因)이 된 것은 동의대 학생들이 쌓아둔 화염병과 그로 인한 화재였지 노태우 정권의 진압명령이 아니라는 점이다.
양측의 갈등이 격화되어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마치 일방의 잘못인 것마냥 서술하는 작태에,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심히 불쾌해진다.
전대협 3기 저자들은 이 뒤에도 한 챕터를 할애하여 '진실은 밝혀져야 하며 밝혀질 것이다' 라고 동의대 학생들을 옹호하고 있다. 

동의대 학생 46명은 2009년 민주화운동자로 최종 인정받았다. 순직한 경찰은 1인당 최대 1억 2,700만원을 국가로부터 보상받게 되었다. 

"당시 현중 투쟁에 참가했던 노동자 강성만 씨(당시 현대 해고노동자 현재 현중 7대 대의원, 32)도 비슷한 증언을 하였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화염병을 만들었지만 곧바로 노조원 가족 특히 아주머니들이 전문적으로 제작을 했어요. 어떤 분은 아이까지 등에 업고 이 일을 했어요. 아침에 어떤 아주머니는 동네 수퍼에 찬거리를 사러 가는 것이 아니라 빈병을 사러 가서 그 날 쓸 화염병을 만드는 일을 하시던 분도 있었어요." - p.135,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전대협 3기 - 1989)

아이를 업고 화염병을 만들었다는 아주머님들의 당시 현실이 슬프다.
시너와 휘발유를 섞어 병에 주입하는 과정에서 그 아기는 얼마나 많은 발암물질을 마셨을까...

"전대협은 강씨(강경대 열사) 사망 이후에 이틀에 한 번 꼴로 대규모 시위를 조직화했다. 하지만 4월 말 전남대 박승희 씨의 분신 이후 경원대 천세용 씨, 안동대 김영균 씨, 김기설 씨, 윤용하 씨, 보성고생 김철수 군 등이 잇달아 분신하고 한진 노조위원장 박창수 씨가 투신하는 등 정국은 수많은 젊은이의 죽음으로 어두워져갔다." - p.261, 백만학도의 사랑, 투쟁, 영광 (전대협 5기 - 1991)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의 계기가 된 일련의 사건들이다. 
'한 생명은 정권보다 크다'는 생명존중 사상을 드러내려 했건만 이 칼럼으로 인해 김지하 시인은 운동권으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힌다.

"...당시 중앙대 부총학생회장이었던 김재곤(88학번)씨는, '우리 학교 간부들은 이상하게 반파쇼민주화투쟁은 잘 하는데 조국통일투쟁은 영 꽝이란 말이야, 이래 가지고 어디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겠나.' 하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학생회 간부들이 92년 전대협의 조국통일운동노선을 달달 외우도록 닥달을 해대었다. 덕분에 중앙대학교 간부들 중에서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올해 범민족대회의 기조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면 '예, 올해 범민족대회의 정치적 과제는 주한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통일의 기치를 분명히 드는 것이고, 조직적 과제는 범청학련을 결성하여 범민련을 강화하고...' 하면 막힘없이 줄줄 읊어대었다. 당시 중앙대 간부들은 마치 갓 입대한 신병처럼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후략)" - p.287, 전대협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전대협 6기 - 1992)

94년만 해도 후배 학생회간부들을 들들 볶고 정신교육하던 것이 자랑할 만한 일이었으니 당당히 써 놓았겠지.
다 큰 성인에게 사상과 신조를 외우도록 강제하는 것이 참으로 잘하는 짓이다.

이러한 주입식/단일화 운동노선은 한총련 세대에서 더욱 강화되어버려, 
중앙집행위(중집)에서 결정하면 각 학생회 스스로의 생각은 배제하고 결정안대로 학생운동하는 경향이 더 심해진다.

문민정부의 집권 이후에도 이어지는 폭력시위, 프락치 의심자 치사사건의 악재 속에서 
독단과 아집마저 버리지 못한 비타협적인 한총련 운동권은 일반 학생과 시민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기성세대의 나약함, 무기력함에 실망하면서 우리는 사회에 나가서 절대 그러지 말자고 결의했던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과연 우리는 그러한 자세와 열의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혹시 또 다른 기성세대로 편입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왕년에는 거리에서 한참 날렸지' 목에 힘주며 술자리에서의 안주거리로 과거를 팔아먹고 사는 것은 아닐까? 희망을 잃은 세대는 과거를 팔아먹고 살 수밖에 없다는데." - p.341, 후기

전대협 학생운동가들은 386 젊은 피 영입이 한창이던 90년대 말에 대거 제도권정치로 입성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21대 국회의 과반수를 586이 틀어쥐고 앉았다. 기득권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이제는 그 윗세대는 은퇴해서, 아랫세대는 머릿수가 딸려서 이들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독주한다 해도 견제할 수 없게 되었다.
목에 힘은 준 것 같지만 희망은 잃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도 더 많이 해먹을 수 있으니까 과거를 팔아먹을 필요도 없다.

왕년에는 거리에서 한참 날렸던 분들의 싹수는 2000년 광주 룸싸롱 새천년NHK에서 5.18 전야제를 마치고 여자 끼고 술 먹던 때부터 이미 누렇게 보이기 시작했었다고 본다. 

 

[기고]유시민/'부적절한 술판'벌인 386에게

‘386 당선자들의 부적절한 술자리’가 일으킨 파문을 보는 소감은 ‘허탈함’과 ‘막막함’으로 요약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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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운동권의 아픈 손가락이 되어버린 학생운동가들이 참 많다.
보통 떠올리는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 강경대 열사 외에도 너무도 많은 젊은이들이 고난과 상처를 겪었다.
86년 시너를 부은 몸으로 전방입소거부투쟁을 벌이다 경찰진압이 격화되어 분신한 김세진, 이재호 열사는 집회현장의 주변 학생들에게 많은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남겼다. 
92년에는 전면적인 민주 대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라던 6기 태재준 의장은 고문과 감시의 후유증으로 지금은 서울역과 지하철을 떠돌게 되었다.

왕년을 함께했던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깨끗하고 유능하고 바른 정치가 이제라도 586에 의해 이루어졌으면 하고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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