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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에 관하여/수불석권 프로젝트

[수불석권 프로젝트] (4)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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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이영훈 교수 외 5인이 공동으로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를 이제사 읽어봤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거나 근거가 부족한 국민의 반일 정서를 꼬집는 책이다.

 

이영훈 교수가 학교에서 여는 강의는 강성윤 교수의 정치경제입문 강의(맑스주의 경제학의 기본개념을 다룸)처럼 학생과 교수 간의 키배가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십중팔구 교수의 완승으로 끝난다.

 

논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학생들은 "교수와 제자 간 논쟁이라는 포맷 자체가, 특히 유교적 질서가 강한 한국에서는, 교수는 무리한 주장을 해도 제자가 수긍해야 하고 학생의 주장에 대해서는 교수가 끝도 없이 근거를 요구할 수 있으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정신승리를 하곤 한다. 

 

미성숙함의 정도가 더 큰 학생의 경우 'ㅇㅇ 알겠는데 난 그냥 반일할거임ㅋㅋ엌ㅋㅋㅋ' 또는 'ㅇㅇ 알겠고 사회주의 어쨌든 망했음 ㅅㄱ 프리드먼 짱짱맨 ~.~' 하고 그냥 귀를 닫아버리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그냥 근거도 없이 얘기했다가는 돌맞을 내용이기 때문에, 저자들은 뒷받침할 자료와 통계를 꼼꼼하게 준비해서 대한민국 국민이 일상적으로 보이는 반일정서에 내재된 논리를 하나씩 논파해 나간다.

 

그러나 "너 지금 일제 편드는거야? 그냥 입 꾹 닫고 내 편 들어주면 안돼?" 마인드가 탑재된 사람은 아무리 잘 준비된 논리와 근거를 들이밀며 뜬구름 잡는 반일 좀 그만하라고 하더라도 그게 귀에 들어갈 리가 없다.

쇠말뚝설 같이 그 기원이 완전히 허구로 판명된 것 정도까지는 들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본 저서에서 주장하는 바 '탄광 노동 조선인이 일본인 노동자보다 평균급여가 더 적었던 것은 근속년수와 채탄경력 차이에 따른 생산성 차이의 결과임' 과 같이 사실관계 자체는 살아있고 그 평가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인 경우는 '반대편 주장도 들어봐야지' 하고 신념 수정을 유보할 수 있게 빈틈을 내준다.

 

전반적으로는 술술 읽히나, 이영훈 교수가 쓴 챕터의 경우 런승만을 억지로 띄우기 위해 애쓴 듯한 내용들이 눈에 띈다. 런승만은 대표적인 반일주의자며, 별다른 근거도 없이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나음 빼애애액' 하던 인간이었다. 뉴욕타임즈에 게재한 이승만의 사설(1919.05.18)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초대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도 초강경 반일정책을 펴서 미국도 힘들어했을 정도이다. 별다른 근거 없는 한국인의 반일이 반일 종족주의가 아니면 무엇인가?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명백히 우수하다-New York Times(1919. 5. 18) : 이승만학당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명백히 우수하다  New York Times  1919. 5. 18  귀지가 와이드 칼럼으로 게재한 래드 교수의 한국관련 기사는 명백히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 2천만 명의 한국인들은 래드

syngmanrhee.kr

즉 책 전체에 걸쳐서는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해놓고 정작 반일 종족주의의 일원인 런승만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힘쓰다보니 글이 어색해진 것이다.

 

 

 

조국흑서에서 지적하듯 이제는 팩트보다는 호오(好惡)가 더 중요한 2020년, 정치도 팬덤정치화된 2020년이기 때문에, 반일종족주의를 인용하는 사람이든 애써 무시하는 사람이든 그 기저에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 합리적 의심이 되어버린 듯해서 서글프다.

 

인상깊었던 문단 2개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 신문이 그에 관해 오보를 내거나 그에 일반 백성이 격분하여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을 망국의 주범으로 저주한 것은 그런대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11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 한국인이 망국의 책임을 '을사오적'에 묻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정신문화의 지체를 의미합니다. 조선왕조의 멸망은 조선의 국가체제가 총체적으로 실패한 것을 의미합니다...(후략) - p.211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인들은 더 없이 분노합니다. 반일 종족주의라는 집단 정서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반응할 집단 정서가 없습니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고백한 여인이 170여 명이나 됩니다만, "나는 미군 위안부였다"고 고백한 여인은 불과 두세 명입니다. 나아가 "나는 한국군 위안부였다"고 폭로한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고백을 권유받은 여인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단호히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그들을 보호하고 지원할 집단 정서가 거기에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후략) - p.270~271

 

이빨이 길어지는데, 밑줄 친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반응할 집단 정서가 없습니다.'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92년 동두천 기지촌에서 주한미군 육군 이등병 Kenneth Markle에 의해 윤금이씨가 살해된 이후로 전국 시민단체와 대학생(특히 NL 계열)들이 반미와 기지촌여성 문제를 메인 아젠다로 삼아 투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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